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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모도원 - 日暮途遠 ]

우암 2025. 6. 18. 00:01

( 날 일 / 저물 모 / 길 도 / 멀 원 )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라는 뜻으로.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출 전 > 사기. 오자서열전 (伍子胥列傳)

   춘추시대 말기 오(吳) 나라는 초(楚)를 평정하고 급격히 그 세를 불려 한때는 중원의 패권을 넘보기까지에 이르렀다. 오나라가 이렇게 강대해진 것은 초나라에서 망명해 온 오자서 때문이었다.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초 평왕(平王)의 태자 건(建)의 태부였다.  평왕 2년 소부(小傅)인 비무기(費無忌)의 참언으로 아버지 오사와 형 오상(伍尙)이 죽음을 당하자 오자서는 초를 도망쳐 나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다.

 

   오왕 요(僥)와 공자 광을 알현한 오자서는 공자 광이 왕위를 은근히 탐내며 자객을 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전제(專諸)라는 자객을 구해서 공자 광에게 보내고 자신은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공자 광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만을 기다렸다.

   오왕 요의 12년(BC 512년), 초평왕이 죽고 비무기가 평왕에게 바친 진녀(秦女)의 몸에서 태어난 진( 軫:소왕 )이  위에 올랐다. 당연히 비무기의 전횡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1년이 못 가서 내분이 일어나 비무기는 살해되었다.

 

   오자서는 자기가 해치워야 할 원수 둘을 계속 잃게 되었다. 하지만 초나라로 쳐들어가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비무기가 살해되던 해, 오왕 요는 초의 내분을 틈타 단숨에 이를 치고자 대군을 초로 출병시켰다. 그런데 또 그 틈을 타서 공자 광은 자객 전제를 시켜 왕 요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오왕 합려(闔閭)이다.

 

   그로부터 오자서는 손무(孫武)와 함께 합려를 도와 여러 차례 초나라로 진격해 마침내 합려 왕 9년(BC 506) 초의 수도 영을 함락시켰다.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소왕(昭王)을 찾았으나 소왕은 이미 운(隕)으로 도망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평왕의 무덤을 파고 그 시체에 3백 대의 매질을 하여 오랜만에 한을 달랬다.    [ 굴묘편시 掘墓鞭屍 ]

   오자서가 초에 있을 때 친교가 있던 신포서(申包胥)라는 사람은 이때 산속에 피해 있었으나, 오자서의 그런 행태를 전해 듣고 사람을 통해 오자서의 보복이 너무나도 심한 것을 책망하고 그 행위를 천리(天理)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서 오자서가 신포서에게 보낸 답신에 있는 말이 바로 이 성구인 것이다.

   " 나를 대신해서 신포서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게.  나는 지금 해는 지고 갈 길은 멀다. 그래서 나는 사리에 어긋나게 복수를 할 수 밖에 없었네 ( 爲我謝申包胥  我日暮途遠  我故倒行而逆施之 )"

   즉 자신은 나이가 들고 늙어 가는데 할 일은 많다. 그래서 이치에 따라서 행할 겨를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 차례를 바꾸어서 행한다"는 뜻으로 " 도행역시(倒行逆施)"라는 성구도 나왔다.

 

   그 후 신포서는 소왕을 찿아가 나라를 부흥시킬 계획을 상의하였으나 힘이 없었다. 신포서는 소왕의 외할아버지인 애공(哀公)이 다스리는 진(秦) 나라로 가서 초나라가 망하면 진나라도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며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애공은 전쟁을 벌일 마음이 없어 응하지 않았다.

 

   신포서는 진나라 궁정의 담벼락에 기대 앉아서는 7일 동안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곡을 하였다. ( 立依於庭牆而哭  日夜不絶聲  勺飮不入口  七日 ).

 

   애공은 결국 신포서의 충정에 감동하여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진정지곡 秦庭之哭 ]

   신포서는 진(秦)나라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를 부흥시켰고, 오자서는 도리어 오왕 부차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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