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마태수 - 三馬太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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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마태수 - 三馬太守 ]

고사성어

by 우암 2023. 9. 2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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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삼 / 말 마 / 클 태 / 지킬 수 )

"세 마리의 말만 타고 오는 태수"라는 뜻으로,. 재물을 탐내지 않는 청백리(淸白吏)를 이르는 말이다.

< 출 전 > 경국대전 (經國大典)

  한 고을의 수령이 다른 부임지로 떠날 때나 임기가 끝났을 때 감사의 표시로 고을에서 좋은 말 여덟 마리를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조선 중종(中宗) 때  송흠(宋欽)은 새로 부임해 갈 때마다 세 마리의 말만 받았다. 한 마리는 본인, 나머지는 어머니와 아내가 탈 말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삼마태수라 불렀다.

< 경국대전 >에 있는 이야기이다.

     송흠(宋欽)은 성종(成宗) 때인 1492년 식년과(式年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근무하다가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비판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중종의 반정(反正) 뒤인 1516년에 복직하여 홍문관(弘文館) 박사(博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의 관직에 올랐다. 

특히 그는 1528년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된 뒤, 장흥부사(長興府使), 전주부윤( (全州府尹), 전라도 관찰사 등 지방의 외직을 오랜 기간 역임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지방관이 사용할 수 있는 역마(驛馬)의 수를 관직에 따라 법으로 정해 놓고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부사(府使)의 경우에는 부임이나 전임을 할 때 짐을 운반하는 태마(太馬) 1 필을 포함하여 3 필의 말을 쓸 수 있고, 수행하는 사람을 위해 4 필의 말을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지방관은 7,8 필 이상의 말을 타고 떠들썩하게 부임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송흠은 늘 세필의 말만 사용하여 검소하게 행차했으며 짐도 단출하였다. 이로써 그는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렴한 관리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렸다.  송흠이 지극한 효성과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아지면서 "삼마태수"는 청백리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한편, <고려사(高麗史)> 에는 이와 비슷한 팔마비(八馬碑)의 고사사 전해진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 승평부(昇平府, 순천)의 부사(府使)로 있던 최석(崔碩)이 비서랑(秘書郞)이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승평부에서는 지방수령이 전임을 하게 되면, 태수에게는 8 필, 부사에게는 7 필, 법조(法曺)에게는 6 필의 말을 주되 마음껏 고르게 하였다.

    최석이 떠날 때에도 마을 사람들은 말을 바치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도록 청했다. 하지만 최석은 말은 경도(京都)에만 이를 수 있으면 될 것을 골라서 무엇하겠느냐며 웃어넘겼으며, 집에 돌아간 뒤에는 말을 되돌려 보냈다.

마을 사람들이 말을 받지 않자, 최석은 " 그대들의 고을로 가서 말이 낳은 망아지를 데리고 온 것도 나의 탐욕이다. 그대들이 지금 말을 되돌려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내가 탐을 내면서도 겉으로만 사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하며 그 망아지까지 모두 돌려주었다.  이로써 말을 바치는 폐단이 없어졌으며, 승평부(昇平府)의 사람들은 최석의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八馬碑)라 하였다.

    1308년(충렬왕 34년)에 세워진 팔마비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훼손되었으나, 1616년(광해군 8년)에 승주부사(昇州府使)로 부임해 온 이수광(李睡光, 1563~1628)이 복원하여 지금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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