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사람의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한번 내뱉은 말은 되돌릴 수 없으며 말을 할 때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출 전 > 논어. 안연편(顔淵篇)
<시경> 대아 억편(抑篇)에 나오는,
흰 구슬의 이지러진 것은 차라리 갈(磨) 수 있지만
이 말의 이지러진 것은 어찌할 수 없다.
白圭之玷尙可磨也 ( 백규지점상가마야 ) 斯言之玷不可爲也 ( 사언지점불가위야 )라고 한 것도 한 예다.
공자의 제자 남용(南容)은 이 시를 읽으며, 그 뜻의 깊음에 감탄한 나머지 세 번을 거듭 되풀이했고, 공자는 그것을 보고, "남용은 나라에 도가 있으면 출세를 할 것이요, 나라에 도가 없어도 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그를 조카사위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논어>에 나온다.
당나라 명재상 풍도(馮道)는 그의 "설시(舌詩)"에서,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 口是禍之門 舌是斬自刀 )"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화자구출(禍自口出)이요, 병자구입(病自口入)" 이란 문자도 다 같은 뜻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사불급설"도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비유로 한 말이다. 사(駟)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빠른 수레를 말한다. 아무리 빠른 수레로도 한번 해버린 말을 붙들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즉 "네 마리 말도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자공(子貢)의 말이다.
극자성(棘子成)이란 사람이 자공을 보고 말했다.
"군자는 질(質)만 있으면 그만이다. 문(文)이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그러자 자공은, "안타깝도다, 사( 駟 :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 )도 혀를 미치지 못한다. 문이 질과 같고, 질이 문과 같다면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이 개나 양의 가죽과 같단 말인가"라고 그의 경솔한 말을 반박했다.
"질(質)"은 소박한 인간의 본성을 말하고, "문(文)"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예의범절 등 외면치레를 극자성은 말하고 잇는 것 같다. 실상 그로서는 호랑이 가죽이나 개 가죽을 같이 보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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