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절정쟁 - 面折廷爭 ]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 면절정쟁 - 面折廷爭 ]

고사성어

by 우암 2022. 11. 27. 06:01

본문

( 낯 면 / 꺾을 절 / 조정 연 / 다툴 쟁 )

군주의 면전에서, 혹은 조정에서 군주의 덕행이나 정사(政事)에 관하여 논쟁을 함.

 뜻이 바뀌어 강직한 신하를 이름.

< 출 전 > 사기 여후기(呂后紀)

 한(漢) 고조는 만년에 이르러 척부인(戚夫人)을 총애했으며, 척부인의 아들 여의(如意)를 조왕(趙王)으로 책봉했다. 고조는 여후의 아들인 태자 유영(劉盈)이 유약해서 늘 근심하던 터였으며, 오히려 여의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 태자 유영을 폐하고 여의(如意)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대신들을 모아놓고 의논해 보니 다들 반대했으며, 심지어는 장량마저 동의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대신들은 당시 명망이 높았던 상산사호(商山四皓)를 하산시켜 태자를 보좌하도록 했다.

 

 "상산사호"란 진(秦) 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상산(商山)에 살던 동원공(東圓公), 하황공(夏黃公),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를 가리킨다. 이들이 모두 눈썹과 머리카락이 희었다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렇게 되니 고조는 태자를 폐할 방법이 없었다. 고조는 병이 들어 살 날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대신들을 불러놓고 백마 한 마리를 잡았다. 대신들과 함께 그 피를 마시면서 이렇게 맹세하게 했다.

 

  "유씨 성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세우지 않고, 공로가 없는 자에게는 작위를 주지 않는다. 이 맹약을 위반하는 자는 모두들 힘을 합쳐 없앤다. "

 

 이것이 "백마의 맹약(白馬之盟)"이다.  고조 유방이 떠나고 고조의 황후 여후(呂后)가 사실상 정권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백마의 맹세를 거스르고 본인의 친족 여씨들을 왕에 않히려 하였다.  그러기 전에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자 먼저 우승상 왕릉에게 물었다. 왕릉은 당연히 안 된다고 간언 하였는데, 이에 심기가 상한 여후는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을 불러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크게 화가 난 왕릉은 그들 둘을 만나 힐문했다.

 " 태후께서 옳지 않은 길을 가려 하시는데 어찌하여 공들은 그걸 찬성했소?  맹세가 살아 있는데 나중에 구천에 들면 폐하를 어찌 뵈려 그러시오? "

 

 그러자 진평은 이렇게 대답했다.

 " 지금 조정에서 면절정쟁(面折廷爭)하기는 내가 우승상만 못하지만 사직을 지키고 유씨 후손을 안정시키는 것은 우승상이 우리만 못할 것이오 "

 

 이 말을 듣고 왕릉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어 태부로 물러 앉은 뒤 칭병하여 낙향했다. 낙향한 뒤로는 조정에 나서지 않았으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기원전 180년 경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작위는 아들이 이어받아다.

 

 

반응형

'고사성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명강리쇄 - 名韁利鎖 ]  (1) 2022.11.29
[ 멸차조식 - 滅此朝食 ]  (0) 2022.11.28
[ 면벽공심 - 面壁功深 ]  (0) 2022.11.26
[ 면목 - 面目 ]  (0) 2022.11.25
[ 면류관 - 冕旒冠 ]  (0) 2022.11.23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