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중재상 - 山中宰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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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재상 - 山中宰相 ]

고사성어

by 우암 2023. 9. 20.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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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뫼 산 / 가운데 중 / 재상 재 / 재상 상 )

  산중에 은거하며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만 나와 일을 보는 사람.

< 출 전 >  남사 (南事)

  이 말은 유. 불. 도 삼교(三敎)에 능통했던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 나라 학자 도홍경(陶弘景)이  양 무제(武帝)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국가의 길흉. 정토(征討) 등 대사에 자문역할을 하여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불리었던 데서 유래한다.

  <남사>에 있는 이야기다.

    도홍경의 다른 이름은 화양진인(華陽眞人)이다. 도홍경의 아버지가 첩(妾)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도홍경은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도홍경은 총명하였고 갈홍의 저서에 큰 영향을 받았다. 도술을 닦기 좋아했으며 책 만 권을 읽었으며 경사자집을 통독하였으며 거문고와 장기, 바둑, 그림, 붓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도홍경의 키는 7척 7촌이며 풍채가 수려하였다. 눈동자가 맑고 시원스럽게 생겼으며 눈썹이 가지런했다. 이마는 넓고 두 귀는 높이 치솟았으며 귀마다 70개의 털이 밖으로 2촌쯤 길게 나와 잇고 오른쪽 무릎에 수십 개의 검은 점이 잇는데 칠성문(七星文)을 이루고 있었다. 도홍경의 귓속은 긴털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홍경의 귀를 쳐다볼 때마다 괴인이라고 생각했다.

  도홍경의 20세 때  이미 명성이 대단한 학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남조(南朝) 제(齊) 나라의 조정으로 초청받고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들에게 경학(經學)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남제(南齊)의 초대왕 고제(高帝)와 2대 왕 무제(武帝)의 스승이었다. 조정으로 불려 들어간 후 바깥세상과 접촉이 없었다. 그래서 도홍경은 시간 있을 때마다 글을 읽었다.

 

    도홍경의 가세는 매우 빈곤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도홍경을 지방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도홍경은 응답이 없었다.  도홍경은 고집을 부리고 영명(永明) 10년 서기 492년에 조복(朝服)을 벗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도홍경은 신무문(神武門) 위에 관복을 걸어놓고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리고 고향 부근에 있는 모산(茅山) 속으로 들어갔다.

 

    양 무제(梁武帝)는 도홍경을 매우 존경하였다. 양 무제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기 때문에 친분이 있었으므로 양 무제는 도홍경을 자주 만나 담소하였다.

    무제는  도홍경에게 여러 차례 조정으로 들어오면 벼슬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도홍경은 완강히 양 무제의 권고를 사절했다.

 

  도홍경은 그림을 한 폭 그려서 자신의 심정을 잘 표현했다. 도홍경이 그린 그림은 화폭 위에 소 두 마리가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풀밭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유유자적한 그림이었고  또 한 마리의 소는 황금(黃金)으로 만든 소의 굴레가 매어져 있었다. 주인이 고삐를 잡아끌려가고 있었다. 주인은 채찍을 들어 소를 때리려고 하는 그림이었다.

    무제는 도홍경이 보낸 그림을 본 후 "도홍경은 장자와 비슷한 사람이군.  아마도 벼슬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 보군!" 하고 말했다.

 

    그러나 무제는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기 어려울 때는 도홍경에게 신하를 보내거나 친히 도홍경이 거처하는 산중 속으로 찾아가서 그의 고견(高見)을 듣고 국사를 논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홍경을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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