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래에서의 맹약"이라는 뜻으로, 힘에 굴복하여 굴욕적인 조약을 맺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출 전 > 춘추좌씨전. 환공(桓公)
핍박에 못 이겨 굴욕적으로 맺은 조약으로 적에게 성을 포위당한 끝에 견디다 못해 나가 항복하는 것이 성하지맹이다. <춘추좌씨전> 환공 12년(BC 700)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 그 계책을 따르니 교(絞) 사람들은 초나라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이튿날에는 교 사람들이 서로 앞 다투어 나서서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 숨어 있었으므로 교 사람들은 대패하여 성 아래서 맹세하고 돌아갔다. ( 楚人坐其北門. 而覆諸山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
초(楚) 나라가 교로 쳐들어 갔을 때의 일이다. 초나라가 교(絞)를 쳐들어가 성 남문에 진을 쳤다. 막오(莫敖)라는 벼슬에 있는 굴하(屈瑕)가 계책을 말했다.
" 교 땅의 사람들은 도량이 좁고 경솔합니다. 사람이 경솔하면 또한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땔나무를 하는 인부들을 호위병을 딸리지 않은 채 내보내서 이것을 미끼로 삼아 그들을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굴하의 꾀에 따라 나무하는 인부들을 호위병 없이 내보냈다. 교 땅 사람들은 예상한 대로 북문을 열고 나와 산속에 있는 초나라 인부를 30명이나 잡아갔다.
이튿날 더 많은 인부를 내보냈다. 교 땅 사람들은 어제 있었던 일에 재미를 붙여, 성문을 열고 서로 앞을 다투어 산속의 인부를 쫓기에 바빴다. 초나라 군사는 이 틈에 북문을 점령하고, 산기슭에 숨겨 두었던 복병이 일어나 성 밖으로 나온 군사를 습격함으로써 크게 승리를 거두고 성 아래에서의 맹세를 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성 아래에서의 맹세는 압도적인 승리와 패배를 뜻하므로 "성하지맹"을 당하는 쪽의 굴욕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증명해 주는 예가 선공(宣公) 15년의 기록에 나온다.
초나라가 송나라 성을 포위했을 때 송나라가 끝내 버티고 항복을 하지 않는지라, 초나라는 신숙시(申叔時)의 꾀를 써서 숙사를 짓고 밭을 가는 등 장기전 태세를 보였다.
과연 송나라는 겁을 먹고 사신을 보내 화평을 청해 왔다.
" 성 아래에서의 맹세는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군대를 30리만 후퇴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성하지맹"은 교 사람들이 성 아래까지 진격해 들어온 초나라에게 항복할 것을 맹세하는, 즉 초나라에게는 압도적인 승리요, 교에게는 굴욕적인 패배를 비유한 말이다. 제대로 반격해 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여 치욕적인 강화를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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